과장이나 병원장부터 부르는 환자는 하루에 한명은 꼭 있다. 대개 실제 그 사람들과 친분 이 있거나 병원신세를 오래졌던 만성 환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간혹 취객이나 무개념 싸이코들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만성질환으로 본원을 오랫동안 다녔던 할마이, 할아버지들이야 '나~ 누구누구 과장님 알어, 언제오는겨' 라거나 '모모 과장님이 아프면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혔어. 라며 떼쓰는 모습은 때론 귀엽기도, 측은하기도 해서 웃으며 설명하고 달래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허나 정말로 참기 힘든 경우도 있다. 바로 취객이나 무개념 싸이코 환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명확한 의학적 문제가 있다면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대개 응급실에서 진상을 피우는 인간들은 심플한 문제인 경우가 많기에 짜증이 배가 된다. 오늘도 술에 떡이 되어서 응급실을 찾아온 단순 타박상 환자의 보호자는 내게 다짜고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어린 놈은 꺼지고 원장을 데려오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얼핏보기에 또래즈음 되보이는 녀석이 '*발, 쌍*, 개*밥...' 등의 욕설을 퍼부었고, 발 끝 말초혈관부터 전해저오는 분노의 전율은 나로 하여금 더이상 흰가운 고이 차려입은 젠틀한 미소의 의사 선생님이길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마음먹고 경고성 멘트라도 한마디 날려주려고 안되면 물리적 충돌이라도 불사하려 준비하던 찰나 일행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 서너명이 술이 떡이 된채로 응급실에 들어왔고, 그 환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1:1의 상황이 1:4의 상황으로 전환될 수도 있음을 나의 동물적인 육감을 통해서 알아챘고, 여기선 화를 내며 맞대응 하는 것보다는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작전이 의사로서 위신도 살리고 개인적인 안녕도 취할 수 있는 길임을 직감했다. 얼마 뒤, 그 청년의 부모가 찾아왔고 상황이 원만히 수습되어 무사히도 물리적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이번 환자의 보호자와 같이 응급실에선 가끔 막무가내로 분과 전문의만 찾는 환자나 보호자를 종종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과의 전문의가 24시간 응급실에 상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응급실은 응급 환자를 대상으로 독자적인 선별 및 케어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는 곳이기에 일반적인 진료보다 다소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응급실은 응급실 당직의 혹은 응급의학 전문의가 1차적으로 환자를 판단하고 적합한 응급처치를 시행한 후, 분과 진료가 필요하다 판단되면 해당 전공의 혹은 전문의의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즉, 해당 분과의 전문적인 처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응급실을 방문하더라도 응급의사의 1차적 처치(검사나 소독 등) 및 판단을 거쳐야 하기에 분과 전문의로부터 처치를 받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늦은 시간, 응급실 당직의가 판단하기에 응급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응급실 의사를 거치지 않고 분과 전문의의 진료를 보게 해달라며 욕하고 떼쓰는 행위는 환자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치 시간만 더디어질 뿐이다. 환자가 실제 응급 상황이라면 응급실 의사들이 알아서 1차적 처치를 시행하고 빠르게 분과 진료를 볼 수 있도록 대처한다. 부디 응급실에 방문했다면 응급실 의사의 판단을 믿고 기다리는 여유를 환자나 보호자들이 가졌으면 좋겠다.